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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발발 46돌 즈음에 나온 박명림(고려대 강사·정치학) 씨의《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은 10만 쪽이 넘는 국내외 1차 자료의 섭렵, 관련자 인터뷰, 현장 및 지형답사와 그것의 치밀하고 엄정한 분석에 기초하고 있는 대작이다. 이 연구는 방대하고 복잡한 사실을 탄탄한 역사사회학 및 정치학의 이론적 틀과 방법론에 의거해 조망함으로써 협애한 실증주의와 무책임한 이론주의를 동시에 뛰어넘고 있다.
한국전쟁을 세계적·동아시아적·남북국내적 3가지 수준에서 조망하고 있는 지은이의 총체적 연구는, 식민지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한국전쟁의 기원을 찾는 근본주의적 시각이나, 6월 25일 하루의 사태에서 전쟁의 책임을 캐려는 현상적 해석 두 가지 모두를 거부하며'기원'과 '발발'의 결합을 시도한다.
'발발'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제1권에서는, 스탈린 -마오쩌둥 - 김일성·박헌영으로 이어지는 '동아시아 공산주의 삼각동맹'에 의한 전쟁의 구체적 결정과정과 6월 23일∼25일 3일간의 상황을 치밀하게 재구성해, '북침설'과 '유도설'을 정면으로 반박한다. '기원'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제2권에서는, 이미 1948년부터 한반도에 형성된 두 개의 국가인 남북한간의 '대쌍관계동학'의 급진적·모험적 군사주의를 유발시키는 과정을 분석한다.
남북한의 비교분석을 통해 북한의 '혁명'이 남한의 개혁에 비해 더 진보적이거나 자주적이지 않았고(가장 논쟁적인 부분이다), 따라서 한국전쟁을 단순히 식민지시대의 연장선상에 선 민족해방 전쟁이나 민중과 지배 엘리트를 대표하는 세력간의 혁명내전으로 볼 수 없다는 입장을 내세운다.
안타까운 것은, 이런 치열한 객관적 사실 탐구의 결과물이 벌써 한국의 시대착오적 냉전논리의 좌·우 덫에 걸려 많은 부분이 단순화하고 왜곡 전달될 위험을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한편으로는 지은이의 주장을 '북침설'의 허구를 입증하는 증거로 축소하며 북한에 대한 남한의 우위와 정당성을 홍보하려는 우익 냉전주의자들의 비학문적 차원의 의도가 보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의 주장을 기존의 '진보론'의 입장에서 일종의 '전향'으로 매도하려는 경향이 보인다. 그것은 그의 말처럼 '한 번 상투화한 고정관념은 모든 것을 명백히 해주는 결정적 자료의 제시에 의해서조차' 얼마나 교정하기 어려운가를 말해준다.
한국학을 세계적 차원으로 끌어올린 브루스 커밍스의《한국전쟁의 기원》을 극복하는 연구가 당분간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필자로서는, 지은이의 몇몇 주장에 대해 입장을 달리하면서도, 사실에 대한 10년간의 구도자적 천착을 통해 좌우 이데올로기의 신화를 깨뜨린 그의 연구에 충격을 받았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히 한국전쟁에 대한 사실 탐구에 머물고 있지 않다. 그의 노작은 사회주의 붕괴 이후 새롭게 제기되는 한국전쟁의 의의에 많은 시사점을 던져주며 동시에 한국전쟁 연구를 다학제적인 보편적 이론창출로 발전시켰다는 점에서 우리 인문사회과학의 새로운 고전으로 남게 될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 권혁범(대전대 교수, 정치학)